[프로야구 레젼드]'팬을 위해 사는 남자' 홍성흔

Posted by 웃어요항상
2018.05.10 03:28 스포츠

이 선수는 최고의 포수 혹은 최고의 강타자는 아니다. 하지만 팬을 위해서는 언제나 거침없이 스윙하고 최선을 다해달린다. 내야 땅볼에도 최선을 다하고 그라운드에 나서면 누구보다 열심히 선수들을 독려하고 파이팅이 넘쳤다. 덕아웃에 들어오는 신인선수에게도 박수치며 과도하게 격려하길 꺼려하지않는 그는, 팬들 앞에서는 더욱 최선을 다한다. 팬이 있어 프로야구가 존재한다던 '원조 턱돌이 홍성흔'

 

 

홍성흔은 중앙중-중앙고를 졸업하고 95년 경희대에 입학한다. 유망주였던 홍성흔은 대학에서 주전포수였으나 국가대표에서는 진갑용(고려대), 조인성(연세대)에 밀리며 백업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대학4학년때인 98년 국가대표주전을 차지하고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박찬호, 김동주를 필두로 나선 일명 '드림팀' 일원으로 참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건다. 98년 1차지명으로 조인성을 선택했던 LG 트윈스는 강속구투수 김상태를 지명하자, 포수 천국이었던 두산 베어스에서 의외의 1차지명을 받게 된다.(당시 두산 베어스는 주전이었던 김태형(현 두산베어스 감독), 이도형, 진갑용이 있었다. 특히 10년에 한명나올까 한다던 공격과 수비가 탁월한 진갑용은 홍성흔 입단첫해 삼성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된다. 삼성에게는 최대의 축복이 된다.)

 

입단 첫해였던 99년부터 홍성흔은 주전포수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한다. 비록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였지만, 정규리그 통합 1위(첫 양대리그)를 차지하며, 준수한 수비와 공격을 보였던 그는 신인왕을 차지하며 그의 찬란한 프로생활을 알렸다. 첫해부터 삼진은 많았으나 거침없는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하며 하위타선을 이끌었고, 파이팅 넘치는 공격적인 투수리드 또한 약점이었던 포구를 커버하고도 남았다. (111경기 타율 2할5푼8리, 홈런 16개, 63타점)

이듬해 홍성흔은 2년차 징크스는 없었다. 시즌초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한다. 포수는 박경완과 홍성흔 둘이 차출되었지만 40홈런의 박경완이 아니라 주전포수는 홍성흔 이었다. 역대 올림픽 야구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한다.

 

 

시즌에 들어서도 활약은 계속되고 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를 꺽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당시 91승으로 역대 최다승팀인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먼저 3연패하며 싱거운 시리즈가 되는듯 했지만 우(우즈)-동(김동주)-수(심정수) 트리오의 활약으로 3연승하며 리버스 스윕을 눈앞에 뒀으나 결국 7차전에서 지면서 두산은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127경기 타율 2할9푼, 홈런 10개, 59타점, 127안타)

2001년 홍성흔은 3년연속 두자리수 홈런은 놓쳤지만 팀우승과 첫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3할에 포수 최초의 20-20을 차지한 박경완을 제치고 차지하면서 논란을 있었으나 우승 프리미엄을 어느정도 인정하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팀도 3위로 플레이오프에서 전년도 우승팀 현대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정규시즌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를 꺽고 우승을 차지한다.(122경기 타율 2할6푼7리, 8홈런, 48타점, 109안타)

2002년 전년도보다 강력한 타격으로 18홈런을 기록하며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지만 해태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며 2연패의 꿈을 뒤로하고 시즌을 마친다.(127경기 2할8푼9리, 홈런 18개, 70타점) 골든글러브는 홍성흔 입단때 트레이드된 첫우승을 차지한 삼성의 진갑용이었다.

 

 

2003년 두산은 최악의 해가 된다. 타선을 이끌던 '흑곰' 타이론 우즈와 게리 레스는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하고 박명환과 우즈를 대신할 외국인선수의 부진으로 추락하고, 홍성흔, 정수근의 부상으로 3년연속 꼴찌인 롯데다음인 7위였다. 홍성흔도 개인적으로 풀타임을 뛰지못하며 73경기만을 소화하면서 마친다. 이는 다음해 폭발을 위한 휴식같았다.

사실 공격형 포수로써 이름을 날렸지만 3할타율, 20홈런, 100타점, 개인상을 한번도 받아본적 없는 선수였다. 포수치고 잘치는 선수였다. 하지만 그의 공격본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4년 홍성흔은 최초로 개인상을 수상하는데 최다안타상을 수상하며 타격 3위를 기록하며, 첫 3할타율을 기록하며 다시한번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팀은 다시한번 플레이오프에 오르지만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133경기 3할2푼9리(3위), 홈런 14개, 86타점(5위), 165안타(1위))

2003년 부상으로 포수로써 수비능력이 떨어졌지만 우즈가 빠지고 타격약화가 뚜렷했던 두산은 계속적으로 홍성흔을 포수로 기용하였고 홍성흔도 2005년, 2006년에도 2할후반대 타율과 두자리수 홈런 60타점이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7년 수비당시 타구를 맞아 허벅지부상을 당하고 포수로써 수비능력은 더욱 떨어진다. 이에 김경문감독은 홍성흔에게 지명타자로 전향을 지시했지만 포수의 애착이 강한 홍성흔은 거부하였다. 트레이드설과 2군을 오가며 홍성흔은 최저타석을 기록하며 5홈런만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친다. 2008년도 시즌초 2군에서 시작한 홍성흔은 결국 지명타자로 4월말 기용된다. 본인또한 포수로써 은퇴를 선언하며 타격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팀동료 김현수의 뒤를이어 타율 2위를 기록하며 다시한번 3할대로 복귀한다.(114경기 타율 3할3푼1리(2위), 홈런 8개, 63타점, 140안타(4위))

 

                                                          포수은퇴 시포, 시구자는 큰딸 화리(연기자 홍화리)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하지만 2년연속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홍성흔은 FA를 선언한다. 두산베어스를 떠날것이라는 생각은 본인을 비롯한 타팀팬들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두산은 적은 계약금액을 제시했고 소속팀과의 협상기간이 끝났을때도 두산은 포수로써 활약이 힘든 일명 반쪽선수(수비가 안되는 선수)를 데려갈 팀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날 충격적인 롯데 자이언츠와의 계약이 발표된다. 두산팬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김경문감독과 두산프론트들은 팬들의 성화에 업무를 보지못할 정도였고, 홍성흔선수의 파이팅 넘치는 허슬플레이는 스탯이상의 활약을 보였던 선수이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2009시즌 홍성흔은 로이스터 감독의 요청으로 컨텍형 타격폼을 버리고 장타를 노린 큰스윙을 했다. 그러자 컨텍조차 되지않자 안타도 홈런도 기록하지 못하고 부진을 거듭한 끝에 4월말 허벅지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른다. 반대로 보상선수로 갔던 이원석은 연일 맹타로 홍성흔의 원성은 두배가 되었다. 그리고 열흘후 복귀한 홍성흔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일명 '갈매기 타법'으로 다시 컨텍위주의 타격을 시작했고 언제 부진했냐는듯 시즌후반 3할8푼대를 기록하며 시즌초 꼴찌를 기록하던 롯데를 다시 고공행진에 앞장섰다. 타격왕 경쟁중이었던 박용택과 홍성흔은 LG 트윈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4연속 볼넷을 얻으며 박용택에이어 2위를 기록하였다.(119경기 3할7푼1리(2위), 홈런 12개, 64타점, 158안타(4위))

 

 

2010년 최고의 해가 된다. 전년도에 실패한 장타를 위한 타격을 시도한다는 말에 팬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시즌 중반까지 팀 동료 이대호와 도루를 제외한 7개부문(타율, 홈런, 타점, 최다안타, 득점, 출루율, 장타율)에서 1~2위를 오가며 경쟁하였고, 이대호가 9경기 연속 홈런을 치면서 홈런부문 제외하고도 8월달까지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윤석민투구에 손등을 맞아 골절당하며 부상으로 결장을 하게된다. 9월달 복귀하면서도 계속된 활약으로 비록 이대호의 전무후무한 7관왕을 기록함에 4개부문 2위, 2개부문 3위, 1개부문 4위를 기록하며 지명타자 3년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시즌을 마친다.(111경기 타율 3할5푼(2위), 홈런 26개(4위), 116타점(2위), 88득점(3위), 151안타(2위), 출루율 4할2푼7리(3위), 장타율 6할1리(2위)

2011년시즌 전년도의 메가톤급 활약으로 기대하였으나 장타는 상당히 많이 줄었다. 3할대를 기록하였지만 6개의 홈런으로 장타력이 줄었고 타점도 전년대비 50개가 줄어든 67타점을 기록한다. 하지만 4년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팀도 정규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며 시즌을 마친다.(132경기 타율 3할6리, 홈런 6개, 67타점, 145안타)

2012년 이대호의 일본진출로 시즌초 4번타자로 시작하게 되지만, 부담때문인지 부진의 연속이었고 결국 강민호에게 4번타자를 내주었다. 그리고 6월초 미세골절로 1군에서 말소되었지만, 후반기 다시한번 부활한다. 비록 5년연속 3할은 실패했지만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하며 장타력이 살아났다.(113경기 2할9푼2리, 홈런 15개, 74타점)

 

 

 

이렇게 롯데를 타격의 팀으로 이끌던 '홍(홍성흔)대(이대호)갈(가르시아)' 2011년 가르시아 재계약 포기, 2012년 이대호의 일본진출로 깨졌고, 홍성흔의 2번째 FA 재계약실패로 완전히 깨진다. 구단은 3년을 제시하고, 본인은 4년을 요구해 결국 4년을 제시한 친정팀인 두산으로 입단한다. 2013년 5번타자로 활약하던 홍성흔은 5월 LG와의 경기에서 심판 볼판정에 헬멧을 집어던지는 항의로 프로 데뷔 첫 퇴장을 당한다. 시즌막판까지 4번과 5번을 오가며 활약했던 그는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 시켰지만 준우승에 머무른다.(127경기 타율 2할9푼9리, 홈런 15개, 72타점)

2014년 다시한번 3할타율에 복귀하고 4년만에 20홈런을 기록하며 팀타선을 이끈다. 시즌초반 부진하며 '홍무원'(홍성흔 공무원)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5월초 멀티홈런을 기록하며 부활하며 9월에 200호 홈런을 기록한다. 팀은 6월의 부진을 끝까지 반전을 시키지 못하며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한다.(124경기 타율 3할1푼5리, 홈런 20개, 82타점, 141안타)

2015년은 또다시 부진에 빠진다. 6월 14일 NC와의 경기에서 우타자 최초 2,000안타를 기록하고 9월 24일 3,000루타를 기록하였지만, 잔부상과 부진으로 93경기만을 소화하며 8년연속 100안타 이상에 실패한다. 2016년은 부상으로 17경만을 기록하고 11월 21일 18년간의 길었던 선수로써의 생활을 정리한다.

박찬호의 소개로 MLB 샌디에고 파드리스에 루키팀 코치로 연수를 시작하였고,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면을 인정받아 MLB 정식코치로 계약하며 활약하고 있다. 이제 배우 '홍화리' 아빠의 모습도 기대한다.

통산성적: 1,957경기 타율 3할1리, 홈런 208개, 1,120타점, 2,046안타, 645볼넷, 1,018삼진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