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레젼드] 거인의 魂 '탱크 박정태'

Posted by 웃어요항상
2018.05.07 22:48 스포츠

'이대호가 거인의 심장이라면, 박정태는 거인의 혼(魂)이다'라는 말은 자이언츠 팬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말이다.

선수시절 박정태의 흔들타법은 모든 지도자가 절대로 따라하면 안된다고 말렸으나, 동네야구에서 누구나 따라하던 괴상한 타법의 소유자였다. '작은 거인' '탱크' '악바리'등 그에게 항상 따라붙는 말이다. 정상인으로 삶도 장담못했던 그는 의사의 만류에도 병상에서 아령을들고 당장 복귀를 꿈꾸며 누구나 무모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곧 자기가 옳았다는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많이 특이한 선수다. 부산중학교 시절부터 작지만 뛰어난 실력을 보였던 박정태는 야구명문 부산고, 경남고를 가지않고 어머님이 일하시는 시장근처인 약체 동래고등학교로 진학한다. 1926년 창단된 동래고는 해체된 1998년까지 한번도 전국대회 우승하지 못한 약체팀이었고 박정태시절 40년만에 대붕기 4강에 진출한다. 그렇게 경성대로 진학한 박정태는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롯데 1차지명을 받게된다.

84년 우승이후 가을야구에 올라가지 못한 롯데 자이언츠(이하 롯데)는 박정태가 입단한 91년에 4위로 준PO에 진출한다. 입단때부터 타이밍을 맞추기위해 흔들리는 타법으로 팬들에게 어필하고 작은체구에도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하는등 공수에서 활약한다. 구원 2위였던 조규제에 밀려 신인왕은 타지 못했지만  132안타중 29개의 2루타(1위)등 훌륭한 성적을 기록한다.(타율 2할8푼5리, 홈런 14개, 타점 74타점, 36 삼진, 43볼넷)

 

 

92년 2년차인 박정태는 폭발하였고,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획득한 염종석, 박정태포함 5명의 3할타자로 롯데는 우승을 차지한다. 2년차의 박정태는 2년차 징크스는 커녕 프로에 적응완료를 외치며 2016년 최형우가 깨기전까지 최고 기록인 43개의 2루타를 기록하는등 타율 2위, 최다 2루타를 기록하며 '대도' 전준호, '3루타의 사나이' 이종운 등과 그라운드를 휘집고 다녔다. 뛰어난 선구안으로 42개의 삼진을 당하는동안 69개의 볼넷을 얻어내는등 공,수의 활약으로 현재까지 롯데의 마지막 우승을 이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12경기동안 44타수 17안타로 .388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타율 3할3푼5리(2위), 홈런 14개, 타점 79개(5위), 91득점(4위))

그의 인생은 이제 꽃길만 남은듯 했다.

93년 시즌초 그는 3할5푼9리로 타격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5월 23일 태평양과의 경기에서 슬라이딩도중 다리가 접질러져 발목골절을 당한다. 5군데의 복합골절로 총 6차례의 대수술을 받는다. 첫 수술후 "언제부터 다시 야구를 할수있냐?"는 그의 질문에 "장애없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지도 장담못하겠다."는 의사의 말에도 입원 3개월때부터 아령을 들며 운동을 시작했다. "골수염으로 죽을수도 있다."며 의사가 만류함에도 그는 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게 안타까운 선수 한명이 사라지는듯 했지만 그는 결국 부상 2년만인 5월 16일 복귀전에서 4타수3안타를 기록하며 '박정태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이날 복귀전에 대해 "2년간 자신의 재기를 믿고 응원해주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복귀전은 무조건 안타를 많이 쳐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언급했다. 방위병 신분으로 홈경기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3할대의 맹타로 팀을 3년만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킨다. 하지만 동계훈련도 하지못한 그는 타격이 부진했고 7차전에서 어이없는 실책으로 결승점을 헌납하며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타율 3할3푼7리, 홈런 2개, 30타점)

96년 4월2일 시즌전 방위소집 해제되어 부상복귀후 첫 풀타임을 소화한다. 시즌초반 3할5푼대의 타격으로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알렸으나 시즌중 잔부상등으로 결장이 잦아지고 컨디션난조로 시즌후반 2할9푼대까지 떨어진다. 시즌막판 다시 타격감각을 찾아 3할대로 복귀하였지만 94경기만 출전하며 아쉬운 시즌을 보낸다.(타율 3할9리, 홈런 5개, 61타점)

97년 전년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훈련중독이라는 말을 들으며 강훈련을 하였지만 최악의 부진을 겪는다. 김용희 감독의 지원으로 92년 이후 5년만에 정규리그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지만 타율 .229에 3홈런 40타점이라는 박정태답지 않은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훗날 본인 말로는 이 시즌의 부진이 자만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했는데 실제로는 전해에 워낙 잔부상을 많이 당해 그것을 막고자 체중을 심하게 감량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 이 시즌 박정태의 체중은 겨우 70Kg에 불과했다. 그 탓에 시즌 초반부터 타구에 제대로 힘을 실을 수가 없었고 여름에는 체력마저 급격하게 떨어지는 이중고를 겪었다. 팀 성적마저도 1989년 이후 꼴찌를 기록한다.

 

 

98년 전해의 부진을 씻고자 오히려 몸무게를 10kg이상 늘리고 근육량을 강화한다. 그리고 타격밸런스가 무너지지않게 더욱 노력하였다. 심지어는 꿈을 꿔도 야구하는 꿈을 꿨을 정도로 노력한 끝에 시즌 초반부터 타격랭킹 상위권을 질주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5월에는 .368까지 타율을 끌어올리며 타격랭킹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시즌도중 열린 올스타전에서 4안타를 기록하며 올스타MVP를 수상하는데 승부가 결정난 9회초에 3루타를 치고 3루로 슬라이딩으로 들어오자 '올스타전도 건성으로 하진않는 근성왕'이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외국인 선수와 주포 마해영선수의 부진으로 팀은 2년연속 꼴찌를 차지하지만 타격 3위등으로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타율 3할1푼8리, 홈런 13개, 79타점) 2년연속 꼴찌였던 99년 박정태는 팀 주장을 맡는다.

 

 

지기 싫어하는 근성의 박정태가 주장을 맡았을 때 또다시 루징 시즌을 보낸다는 것은 박정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다잡아 이끌어가는 강한 주장의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본인이 자진해서 유니폼의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리는 농군패션을 시작하면서 전 선수단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던 것. 그래서 이 당시 롯데 하이라이트를 찾아보면 용병과 일부 투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죄다 농군패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선수단을 장악했던 박정태는 팀은 1위를 달렸고 본인은 31경연속안타 신기록을 작성한다.(홍원기선수의 호수비로 일본기록인 33경기는 깨지못했지만 더욱 값진 기록으로 남긴다.) 마해영도 4번 호세의 활약으로 3할 7푼, 35홈런, 119타점으로 폭발하여 팀을 가을야구로 이끈다. 그리고 펼쳐진 플레이오프 7차전 펠릭스 호세가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도중 팬들의 오물투척에 격분하여 방망이를 관중석으로 던지자 퇴장선언이 나왔다. 이에 흥분한 주장 박정태는 선수단을 철수해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김명성 감독의 만류로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하였지만 경기는 2:1로 뒤지고 있었고 4번타자 호세가 퇴장당한 상황이라 이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박정태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얘기한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한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롯데는 결국 삼성을 6:5로 누르며 다시한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하지만 한국시리즈를 했는지 기억조차 없었다는그는 그해를 그렇게 마감한다.(타율 3할2푼5리, 홈런 11개, 83타점)

2000년 박정태는 선수협파동으로 해외전지훈련에 불참한다. 핵심멤버들은 구단들의 담합으로 전지훈련에 참가할수 없었다.(마해영, 박정태, 양준혁등) 하지만 시즌초반 보란듯이 4할대 맹타를 치며 선전한다. 하지만 동계훈련을 하지못한 탓에 체력적으로 떨어졌으나 순전히 타격감만으로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시즌중반 장딴지 파열로 1달넘게 부상에 시달리며 결국 시즌막판 극악의 부진으로 3할대도 기록하지 못하게된다.(타율 2할8푼5리, 홈런 6개, 53타점)

2001년에 마해영이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가 된다.(김주찬, 이계성 <-> 마해영)

이에 장타자가 없는 팀 사정상 좀더 장타 생산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본인 표현으론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게 되면 홈런이나 2루타 수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평소 내야수 플라이로 잡힐만한 타구도 내야수 키를 넘는 안타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동계훈련 때 전성기보다 무려 7Kg나 늘리는 벌크업을 하고 타격폼도 손의 위치를 뒤로 가져가면서 타구의 비거리를 늘리는 장타자로의 변신을 꾀했다. 하지만 최악의 패착이었다.

이에 배트스피드가 느려졌고 그러자 밸런스마져 무너졌다. 부진이 거듭되자 8번타선까지 떨어졌고 팀은 다시 꼴찌를 기록하고 본인또한 부진한 시즌을 마감한다.

 

 

2002년 전년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체중을 감량하는등 노력하였지만 부진의 터널을 쉽게 벗어날수 없었다. 시즌초반내내 1할대의 부진함을 보이며 처음으로 2군으로 강등된다. 후반기 심기일전하여 8월 월간MVP를 기록하지만 결국 2할4푼대로 시즌을 마감한다.

2003년 FA로 등록하였지만, 롯데는 2년연속 팀꼴찌와 박정태의 부진으로 어처구니없는 계약금액을 제시한다. 이에 박정태는 분개하지만 롯데는 아예 FA계약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한다. 타팀에서도 노쇠화를 보이는 박정태와 계약을 망설이며 박정태는 강제은퇴로 내몰렸다. 그러자 롯데팬들이 나섰다.

그동안 롯데의 구단운영에 불만이 많았던 터에 프랜차이즈 스타를 내팽개치는 모습에 분개하였고, 홈페이지 마비등 엄청난 파장에 협상기간 하루를 앞두고 2년 6억원이라는 초라한 계약을 하게된다.

 

늦어진 FA 계약 덕택에 스프링캠프에 뒤늦게 합류하지만 뒤쳐진 몫을 따라잡으려 오버페이스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바로 귀국 조치. 그럼에도 워낙 약했던 선수층 덕택에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며 개막 후 한동안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다가 어깨와 다리에 큰부상을 입고 전열에 이탈해 재활을 하게된다.

2004년 그는 양상문감독의 리빌딩선언으로 처음부터 2군으로 뛰게된다. 하지만 2루수가 4명이나 부상으로 쓰러짐에도 박정태를 쓰지않자 이번에도 팬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결국 8월달에 1군으로 등록한다. 하지만 그는 대타 혹은 대수비로 출전만을 하게된다. 출루율이 5할이 넘음에도 그의 기용은 계속 그러했다.

그러다 결국 시즌 마지막경기 잠실 LG트윈스전에서 5회가 마치고 후배 유지현의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소감을 얘기하던 유지현의 입에서 "이 꽃다발을 자신의 롤모델인 박정태선배에게 바친다"는 말을하며, 롯데의 덕아웃에 있던 박정태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끌어안았다. 그리고 7회초 대타로 나선 박정태는 자신의 마지막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며 대주자와 교체후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사직구장에서 은퇴식을 끝으로 프로선수로써의 생활을 마감한다.

 

은퇴후 미국으로 코치연수후 롯데에서 2군코치와 감독을 역임후 2012년까지 롯데 1군타격코치를 역임한다.

현재 리틀야구단을 운영하고 KBO 운영위원으로 활동한다.

그가 은퇴후 우천경기로 사직구장경기가 취소되면 신인선수들의 박정태 타격폼후 홈으로 슬라이딩 세레머니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방망이를 흔들면서 타이밍을 잡던 게리 세필드처럼 롯데에도 온몸을 흔들던 탱크 박정태가 있었다.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
  1.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웃어요 항상'님덕분에 예전에 유명했던 선수들까지 알게되어 야구에 대한 재미를 더 느낄수있고 빠져들게 된거같아요~^^
    • 짧은 지식으로 쓰는거라 부족하지만 도움되신다니 감사합니다
  2.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네요.
    탱크! 박정태
    늦기전에 부산에서 감독 한번 하는 걸 보고 싶군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