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레전드] 원조 핵잠수함 한희민

Posted by 웃어요항상
2018.04.22 03:20 스포츠

김병현, 정대현선수의 별명이 '잠수함' '핵잠수함'등이라고 불린다.

투수의 투구폼에 따라 오버핸드, 쓰리쿼터, 사이드함, 언더핸드라고 하는데, 김병현은 사이드함에 가깝고, 현재 SK와이번스 박종훈선수 정도만 언더핸드로 던지며 많이 희귀해졌다.

정통파라 불리는 오버핸드가 구속이 많이나와 요즘은 학교때부터 대부분 선수들이 오버핸드로 던지며 일부만 사이드함으로 던지고 언더핸드는 거의 보기 어렵다.

 

 

하지만 80~90년대만 해도 꽤 많은 선수들이 언더핸드 투수가 있었고, 10년연속 선발 10승을 달성한 해태의 이강철 투수등이 존재했다. 특히나 구속보다 변화구 투구에 유리한 언더핸드로 전환한 투수도 있다.

82년 탈삼진왕(당시에는 탈삼진부문은 수상하지 않았음) 노상수선수가 있었지만,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선수는 아무도 190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했던 빙그레 이글스 한희민 선수일것이다.

 

 

86년은 프로야구 출범 5년만에 신생팀인 충청권을 연고로한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된다.(82년 OB 베어스가 충청권을 연고로 하였으나, 원래 서울을 연고로 하였고 3년후 서울로 올라가 MBC청룡과 연고라이벌이 된다.)

큰키에 초등학교시절에 농구선수였다가 중학교에 농구부가 없어서 야구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당시 충청권 강호인 천안북일고, 대전고가 아닌 세광고로 진학하였다.(후에 장종훈, 송진우등 레전드가 출연한다.)

1980년 2학년때 대붕기대회에서 우승을 한다.(고교 전국대회는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가 메이져 전국대회이고 화랑기(부산)와 대붕기(대구)는 반쪽대회이다. 타지역은 모르겠으나 부산은 위 4개대회는 지역예선에서 1,2위가 진출하고 화랑기는 지역예선 1,2위 대붕기는 3,4위팀이 참가하였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선동렬을 선발로 내세운 광주일고와의 준결승에서 계투로 출전하며 10회 연장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름을 알리게된다.

성균관대학에 입학후 일취월장한 한희민은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아시아선수권 우승을하며, 정상급선수로 발돋움하고 84년 봄천 연맹전에서 최우수선수와 우수투수상으로 대학 최고의 투수로 발돋음한다.

86년 빙그레 이글스 신인지명으로 입단하며, 창단팀 멤버가 된다.

 

 

비록 첫해 팀은 7위(꼴찌)를 하였지만 이상군과 한희민의 활약은 대단했다.

한희민은 9승(13패)에 그치지만 175이닝을 책임지며 방어율 3.13과 123탈삼진을 기록하며 미래를 밝혔다.(12완투 3완봉)

30경기 13승 8패 4세이브 방어율 2.36 탈삼진 116개로 206이닝을 소화하며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않고 활약을하며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한다.(14완투 3완봉)

대한민국에 올림픽이 한반도를 휘감을때 마지막 전,후기리그였던 프로야구에도 돌풍이 일어났다.

김영덕감독(후에 한희민이 빙그레를 떠나는 계기가된다.)을 영입한 빙그레는 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으로 이어지는 일명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이끌고 이상군, 한희민, 김대중등의 활약으로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한다.(당시는 전,후기리그 2위팀이 플레이오프를 펼쳐서 한국시리즈 직행한 해태와 한국시리즈를 펼쳤다. 1년 성적은 해태가 1위, 빙그레가 2위, 롯데가 3위였지만 전,후기 모두 3위였던 롯데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다음해부터는 단일리그가 된다.) 

 

 

PO 1차전에서 한희민의 활약으로 삼성전을 승리하며 3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한국시리즈 1차전 해태의 선동렬과의 맞대결에 승산이 없다는 판단으로 에이스 한희민, 이상군을 빼고 이동석을 투입하며 2차전을 기대하였지만, 한희민을 선발로 내고도 2차전을 패하고, 3차전 김대중을 내고도 3연패한다.

하지만 4차전 한희민의 선발로 한국시리즈 첫승을 거두고 하루를 쉬고 한희민은 5차전 구원으로 다시오르며 다시한번 빙그레의 승리를 이끌지만, 6차전에서 패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한다.(1988년~1992년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1990년을 제외하고 한국시리즈 4번에 진출했던 빙그레는 1번도 이기지 못하고 4번의 준우승을 차지한다.)

88년 16승 5패 5세이브 103탈삼진 방어율 3.11을 기록하며 통산 최다승을 기록한다.(10완투 4완봉)

89년 다시한번 16승 4패 6세이브 74탈삼진 방어율 2.50을 기록하며 다시한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지만 다시한번 선동렬의 해태에게 우승을 넘겨주며 2년연속 한국시리즈 진출로 만족해야했다.

90년은 두자리승수를 기록하며 4년연속 두자리 승수를 기록하지만 4점대의 방어율로 약간 부진한 시즌을 보내고 이듬해 팀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만 8승에 그치며 두자리 승수를 실패한다.

 

그리고 운명의 92년 마지막 선발등판인 해태와의 경기중 4회까지 무실점 호투하며 6-0으로 이기고 있었다.

당시 이강철과 다승왕 경쟁을 펼치며 다승왕과 구원왕 동시 수상을 노렸던 후배 송진우를 김영덕감독은 전격투입한다.(김영덕 감독은 이만수선수 트리플크라운을 만들어주기 위해 경쟁자인 홍문종선수에게 9연속 고의사구를 남발하고, 인터뷰에서 '비난은 잠깐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명언으로 비난을 영원하게 기억하게 하였다.)

강성이었던 한희민은 격분하여 트레이드를 요청하고 그해 2승밖에 기록하지 못했던 그를 삼성으로 이적시킨다.

93년 삼성에서 전반기에만 4승을 올리며 다시한번 재기를 하는듯 하였으나, 후반기 중간계투로 투입하려하자 다시한번 트레이드를 요구하였지만 그를 받아주는 팀은 없었다.

그리고 94년 베어스로 입단하였다. 하지만 OB베어스가 아닌 대만 프로야구 준궈베어스였다.

당시 국교단절등으로 2년간 힘든시절을 보내며 그는 은퇴하게된다.(통산 80승 54패 21세이브 595탈삼진을 기록하였다.)

 

2005년 장채근코치의 권유로 기아의 2군투수코치로 입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야인으로 돌아선다.

지금은 광주에서 오리음식점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만 너무도 야구와는 멀어졌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겼던 한희민

비록 100승투수도 아니고 우승을 이끈 선수는 아니었지만, 원조 핵잠수함으로 이름을 날리며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던 그를 오늘날 다시한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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