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스타] 제2의 최동원 '김건덕'

Posted by 웃어요항상
2018.04.21 03:46 스포츠

국내 프로야구의 수많은 유망주 가운데 최고의 자리? 아니 프로야구 주전으로 조차 제대로 뛰지 못한선수는 많다.

대부분의 1~2지망자들 대부분 소속학교 에이스이며 4번타자들이다.

대부분의 에이스들은 혹사로 프로야구 계약과 동시에 먹튀(?)가 되어 1~2년동안 팬들에게 기대를 품게하다가 결국 제대로 활약도 하지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6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NC로 입단했다가 한화로 트레이드된 윤형배, 광주제일고 졸업하고 7억원 계약금을 받고 한화에 입단하였다가 기아로 트레이드되고 승부조작사건으로 퇴출당한 유창식등 수많은 유망주가 사라졌다.

하지만 94년 캐나다 에드먼턴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민타자 이승엽과 함께 '좌승엽 우건덕'이라 불리며 우완투수 가운데 최고유망주 김건덕이 있었다. 그는 중학교시절 이미 140Km를 넘기며 중학교, 고등학교시절 모두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가 된다.

94년 13년만에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

 

                                                                 (가운데 선수들중 가장 큰 김건덕)

 

예선을 7승 2패를 기록하며 4강에 진출하였는데 이승엽선수는 주력타자로 김건덕은 김상태와 마운드를 책임지며 4강으로 이끌었다. (당시 이승엽은 어깨부상으로 투구가 쉽지않았고, 김건덕 역시 손가락 부상이 있었지만 투수로써 치명적인 부상은 아니라 지속적으로 대표팀 마운드를 책임진다.)

예선전에서 꺽었던 미국과의 결승에서 극적인 11-10으로 역전을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81년 1회대회 우승이후 이렇다할 성적을 못내던 한국은 당시 결승상대였던 미국을 제차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94년 최고의 우완투수 김건덕은 타격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아마추어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타격상을 수상한다.(하지만 이영민타격상 수상자는 프로야구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물론 김현수선수는 최고의 선수로 자리잡고 있으나 신인지명에서 프로에 지명을 받지못하고 신고선수로 두산베어스로 입단한다.)

 

우승을 차지하고 대표팀 에이스였던 김건덕과 좌완 에이스였던 이승엽은 졸업을 앞두고 스카우트전은 프로, 아마간 치열한 싸움이 진행되었다.

91년 92신인지명에서 롯데는 당시 구단역사상 고졸 최고액인 1억원을 제시하고도 차명주를 놓쳤던 기억을 떠올렸는지 구단 역사상 신인 최고금액인 2억5천만원을 제시하며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이승엽 선수는 1억6천만원에 삼성에 입단한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프로로 진출하기를 원했던 김건덕의 마음과 달리 부모님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랐고, 대표팀 동기였고 한양대에 같이 입학하기로 예정된 이승엽선수의 권유로 한양대행으로 마음을 굳힌다.

 

 

당시 모 스포츠신문 1면에 “프로팀 스카우트보다 뛰어난 한양대 스카우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김건덕이 원래 원했던 대학은 연세대였으나 언제나 그렇듯 4년 장학금과 경남상고 동기 2명을 함께 입학하는 조건으로 한양대로 마음을 굳힌다.

하지만 입학전 이승엽과 함께 입학전 훈련을 하던중 한겨울 얼음물에 선배들의 속옷등을 손빨래, 새벽에 팬티바람으로 뺑뺑이를 도는등 고교생에게는 엄청난 회의를 느끼게 된다.

또다시 이승엽과 의기투합. 프로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럴려면 일단 수능을 40점 미만으로 받아야한다.(수능 200점 만점)

그래서 배신자를 막고자 1~5번 문제는 1번, 6~10번 문제는 5번을 작성 하기로하고, 수능에 돌입하여 둘다 37점을 맞는 쾌거를 이룬다.

그렇게 수능에 떨어져서 당연히 프로에 입단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통보를 한다.

그러나 김건덕과 이승엽은 좌완 우완만큼이나 다른것이 있었다.

이승엽은 인문계인 경북고출신, 김건덕은 실업계인 경남상고 출신

그렇다. 인문계 고등학교인 이승엽은 내신이 15등급, 실업계 고등학교인 김건덕은 5등급.

결국 이승엽은 불합격, 김건덕은 합격이었다. 

 

사실 김건덕은 대학에 입학한 후 1년동안 투수를 하지못한다.

고등학교때 학교와 대표팀에서 혹사를 했으니 한해는 쉬면서 타자로 활약하였다.

김건덕에게 부상은 없었다. 피로도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간 투구를 쉬고 연습투구를 하는데 어깨근육이 뭉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않아 병원을 다니며 원인을 찾았지만 찾지못하고 통증은 지속되었다.

그 통증은 대학졸업때까지 지속되었고, 롯데는 1차지명 이었던 김건덕을 포기한다.

삼성에 연습생으로 입단하여 1년을 보내고 방출된다.

 

그러자 병역문제부터 해결하자고 했다.

그는 야구선수는 포기하더라도 아버지까지 뇌경색으로 쓰러진 그는 실질적 가장이었다.

4급 공익요원으로 판정받았지만 그의 선택은 병역특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투수가 아니면 타자로라도 프로에 입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병역특례를 하던중 프레스에 손가락 절단을 당하여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간다.(뼈는 안다쳤지만 살이 잘려져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프로야구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야구용품 판매, 세일즈 맨등 많은 일을 하였지만, 운동만을 하였던 그에게 세상일은 젊음만으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모교인 부경고 코치와 지역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활동하였던 그는 2016년 11월 17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다.

 

사실 롯데팬들 이라면 제2의 최동원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에이스였던 황태자 윤학길이나 92년 고졸신화를 썼던 염종석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당시 최고의 짠돌이 구단 롯데가 역대 최고액으로 계약하려했던 김건덕을 제2의 최동원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저 그런 선수로 남았을수도 있지만 너무도 안타까운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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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선수 얘기는 들어본 것 같습니다.
    아까운 선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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