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들의 악몽' 루크 애플링

Posted by 웃어요항상
2018.04.18 04:46 스포츠

한국 프로야구 매니아들은 늘 'MLB는 스토리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런게 없다'는 얘기를 종종한다.

아직 역사가 짧지만 좌완투수 유망주 이승엽선수가 프로입단후 그동안의 혹사에 의한 부상으로 1년간 휴식을 취하기위해 타자로 1년만 야수로 전향한다는 조건으로 대한민국 국민타자 반열에 오르고, 프로에 지명도 못받고 연습생 신화로 최고의 강타자가 된 장종훈 선수, 실업팀 선수여도 수여했던 신인상을 첫해에 너무 신입답지 못한 성적으로 신인상을 받지 못한 장효조 선수등등 역사가 짧아도 스토리는 있다.

그리고 100년 정도의 역사가 진행된다면 더욱 스토리가 넘치는 KBO가 될것이라 생각한다.

 

'투수들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선수라면 베이브 루스, 루 게릭, 테드 윌리엄스, 지미 팍스, 윌리 메이스, 행크 아론같은 강타자도 아니고 '스트라이크존이 히틀러의 심장보다 좁다'는 리키 핸더슨도 아닌 루크 애플링?

루크 애플링은 통산타율 0.310 장타율 0.398에 불과했고 도루도 179개(통산)에 불과하다.(20개 이상한 시즌도 1시즌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시대 투수들은 그를 어떤 슬러거보다도 두려워했다. '장타력 제로'의 그는 최고의 출루 능력을 통해 '투수들의 악몽'(pitcher's nightmare)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애플링의 통산 출루율은 .399로(통산 장타율보다 높다!), 역대 리드오프 중 리키 헨더슨(.401) 바로 다음이다.

 

애플링은 4할 출루율을 8번, 3할9푼 이상을 11번 기록했다. 3번의 100볼넷 시즌을 포함해 80볼넷 이상을 기록한 것이 8번, 반면 50개 이상의 삼진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라이브볼 시대에 '100볼넷 이상-40삼진 이하'를 2차례 이상 기록한 선수는 6명뿐이며, 그 중에서 1번타자는 애플링이 유일하다(나머지는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 멜 오트, 찰리 게링거).

역대 리드오프 중 애플링과 비교될 수 있는 볼넷능력은 리키 핸더슨 정도일 뿐이다.

 

애플링 : .310 .399 .398 / 2422경기  45홈런  179도루 1302볼넷  528삼진
헨더슨 : .279 .401 .419 / 3081경기 297홈런 1406도루 2190볼넷 1694삼진

 

하지만 애플링과 헨더슨은 얻어내는 볼넷의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헨더슨의 볼넷이 극도로 좁은 스트라이크 존 덕분이었다면, 애플링은 어떤 공을 던지더라도 파울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컨택트 능력에서 비롯됐다. 핸더슨이 '기다리는 볼넷'이었다면 애플링은 '만들어내는 볼넷'이었던 것(이에 삼진수는 애플링 쪽이 훨씬 적었다. 애플링 2.5볼넷당 1삼진, 헨더슨 1.3볼넷당 1삼진). 

뛰어난 선구안 덕분에 '스트라이크 존이 히틀러의 심장보다도 좁다'는 말을 들었던 헨더슨은 투수로 하여금 엄청나게 많은 공을 던지게 했다. 하지만 애플링이 투수들에게 저질렀던 '투구수 테러'는 제 아무리 헨더슨이라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헨더슨은 차라리 신사적(?)이었다.

애플링의 타격 전략은 단순했다. 투수로 하여금 내가 치고 싶은 공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애플링은 투수가 '그래 차라리 쳐라'라는 심정으로 그 공을 던질 때까지 질리도록 파울을 만들어냈다.

 

어느 날 애플링은 경기장에 찾아온 친구들에게 사인을 해주기 위해 구단 담당자에게 공 몇 개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대공황 시대로, 2.75달러였던 공 하나조차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담당자는 애플링의 부탁을 거절했다. 화가 난 애플링은 첫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공 10개를 연속해서 관중석으로 날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27달러50센트요. 그리고 난 이제부터 시작이요" 그날 이후 애플링은 언제든 원하는 만큼의 공을 얻을 수 있었다.

 

애플링은 3구 삼진을 쉽게 잡아내는 투수였던 밥 펠러로부터 15구 연속 파울을 만들어낸 바 있으며, <4연속 파울→볼→6연속 파울→볼→14연속 파울→2볼>로 공을 28개나 던지게 하고 볼넷을 얻어낸 적도 있었다. 레드 러핑은 2사 1,2루에서 애플링을 상대했는데, 애플링은 풀카운트에서 10구 연속 파울 후 볼넷을 얻어냈다. 다음 타자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러핑은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글러브를 집어던졌다. 애플링은 17구 연속 파울 후 3루타를 때려낸 적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투수들은 차라리 빠른 카운트에서 안타를 맞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1907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난 애플링이 자란 곳은 애틀랜타였다. 수사관이었던 아버지는 은퇴 후 가구 사업을 했다. 애플링은 원래 왼손잡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유격수를 하려면 오른손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코치의 말을 듣고 타석마저도 우타석에 들어서기 시작했다(원래 왼손잡이였던 것은 헨더슨도 마찬가지. 헨더슨은 동네 친구들이 전부 우타석에만 들어서는 걸 보고 좌타석에 들어서면 안 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대학 2학년때 학업을 포기하고 프로에 뛰어들었다. 마이너리그에서 뛰어난 타격실력은 빠르게 퍼져갔다,

가장 먼저 찾아온 팀은 시카고 컵스. 하지만 컵스는 애플링의 수비 실력에 놀란 나머지 그냥 돌아갔다. 이에 동향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크래커스에게 2만달러를 지불하고 애플링을 데려갔다.

애플링의 수비 실력은 도대체 어떤 수준이었을까? 그는 MLB 최다 실책을 5번이나 기록했으며, 유격수로 나선 통산 2218경기에서 무려 643개의 실책을 범했다. 통산 .948의 수비율은 1910년 이후 1900경기 이상 출장한 야수 중 가장 나쁜 기록이다.

그는 엄청난 강견이었는데 송구가 불안해서, 애플링의 대포알 송구에 1루수보다 1루측 관중석이 더 긴장했다.

아주 나쁜 그라운드 상태와 적극적인 수비도 한몫했다.

 

풀타임 첫 해와 두번째 해에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지만, 루 폰세카 감독은 덕아웃에서 크게 낙담하고 있는 애플링에게 다가가 앞으로 어떤 짓을 저지르더라도 끝까지 믿어줄테니 마음 놓고 하라고 했다. 또한 홈런 말고도 팀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조언을 했다. 이후 홈런 욕심을 완전히 버린 애플링은 그 해 9년 연속 3할의 스타트를 끊었다(.322 .379 .443). 애플링은 점차 자신의 타격을 완성해 나갔고, 수비도 갈수록 좋아졌다.

 

1936년은 최고의 해였다. 그 해 애플링은 .388의 타율을 기록, 아메리칸리그 유격수로는 최초로 타격왕이 됐다(.388 .474 .508). 화이트삭스 선수가 타격왕이 된 것도 처음이었다. 이는 지금도 유격수 단일 시즌 최고 타율로 남아 있다. 또한 이후 더 높은 타율을 기록한 우타자는 없다.

1942년 10년 만에 3할 타율에 실패한 애플링은, 이듬해 만 36세의 나이로 2번째 타격왕에 올랐다. 지금까지 타격왕을 따낸 화이트삭스 선수는 단 2명. 애플링과 프랭크 토머스(1997년)뿐이다. 1901년부터 1996년까지의 첫 96년 간은 애플링 혼자였다.(통산 2749안타로 은퇴한 애플링은 이 두 시즌만 아니었다면 3000안타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44년 만37세의 나이에 2차대전에 참전하게되고 1945년까지 전장에서 2년을 보냈다.

 

복귀 후에도 3할 행진을 이어나갔던 애플링은 1948년 다른 선수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팀의 요청을 받아들여 3루로 옮겼다. 하지만 교체 계획은 실패했고, 애플링은 1949년 42살의 나이로 유격수로 복귀했다. 그 해 애플링은 141경기에 나서 .301 .439 .394를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 42세 유격수가 100경기 이상 나선 것은 그와 호너스 와그너뿐이며, 42세 선수가 400타석 이상 들어서 OPS .800을 넘긴 것도 그와 캡 앤슨, 칼튼 피스크, 배리 본즈 4명뿐이다. 이듬해 애플링은 타율이 .234로 떨어지자 주저하지 않고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 후에도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은 애플링은 1952년 마이너리그 팀을 맡아 올해의 감독에 선정됐으며, 6,70년대 많은 팀에서 타격 코치를 하며 '투수 괴롭히기' 노하우를 전수했다. 1965년 애플링은 94%의 높은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화이트삭스는 그의 등번호인 4번을 당연히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코치에서 물러난 후에도 건강이 악화되기 전인 1990년까지 애틀랜타의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았던 애플링은, 1991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출처: 김형준의 '레전드 스토리'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