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로빈슨데이'

Posted by 웃어요항상
2018.04.17 02:23 스포츠

어제(4월 16일) 우리나라는 세월호 추모식이 있었던지만, MLB 전구장 모든 선수는 등번호가 42번을 달고 뛰었다.

42번이 누가 달았던 번호이길래 전구장 모든선수가 그 번호를 달고 뛰는것일까?

그럼 MLB 최고의 타자? 최고의 투수?

아니다. 그는 10시즌을 뛰며 올린 성적은 1518안타 타율 .311 137홈런 734타점 197도루의 기록을 남긴 선수이다.

그는 경기 도중 사망했던 선수도 아니고, MLB에서 홈런 안타 타점 모든성적이 뛰어났지만 기념비적인 성적을 올린 선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선수 등번호를 달고 뛰는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피부색 이다.

그렇다. 그는 흑인이다. "재키 로빈슨"

1947년 4월 15일 MLB 역사를 뒤집는 최초의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은 100년 가까운 뛰어넘지못한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넘은 선수로 LA 다져스에서 미국 인권법, 인종차별 금지 등이 법제화 되기 전에 데뷔전을 치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로빈슨은 20세기 최초의 흑인선수다. 원래 메이저리그에서는 흑인도 뛸 수 있었다.

하지만 1887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겸 선수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캡 앤슨의 선동으로 흑인선수를 모두 쫓아내면서 내셔널리그를 비롯한 프로리그에는 '흑인선수 불가'라는 불문율이 만들어졌다.

 

1920년 지독한 인종주의자인 케네소 랜디스가 커미셔너로 취임하면서 '장벽'은 더욱 높고 두터워졌다(법원의 무죄 판결에도 화이트삭스의 8명을 쫓아냈던 랜디스는 승부조작이 명백했던 타이 콥과 트리스 스피커는 모른 채 넘어갔다).

1942년 랜디스는 또 다른 개척자였던 빌 빅으로부터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매입해 흑인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만들 것이라는 계획을 듣자마자 내셔널리그 사무국에 필라델피아 구단을 사라고 압박, 빅의 계획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잭 루즈벨트 로빈슨은 1919년 인종 차별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조지아주 한 소작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들 네임은 25일 전에 사망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가 한 살 때 아버지가 가출하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인종 차별이 덜한 곳을 찾아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흑인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현실에 크게 실망한 로빈슨은 한때 갱단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친구의 간곡한 설득으로 벗어났다.

 

로빈슨의 형 매튜 로빈슨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육상 200m에서 제시 오웬스 다음으로 들어온 은메달리스트였다.

하지만 그 후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한 매튜는 거리의 청소부가 됐다.

어느날은 올림픽 대표팀의 자켓을 입고 청소를 하다가 백인들로부터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로빈슨은 스포츠 세계로 이끌어준 형의 안타까운 몰락을 보면서 자신은 형과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UCLA대학 시절 로빈슨은 미국을 대표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유격수와 포수를 맡은 야구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뛰기가 주종목이었던 육상에서는 1912년 올림픽에서 5종경기와 10종경기를 석권한 짐 소프에 비유돼 '검은 소프'로 불렸다.

스포츠위클리는 그를 '풋볼 역사상 최고의 하프백'이라고 평가했으며, 농구판에서는 최고의 가드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로빈슨은 UCLA대학의 수영 챔피언이었으며, 전미테니스선수권에서 4강에 오른 적도 있었다.

 

1942년 로빈슨은 육군에 장교로 지원했다. 하지만 인종이라는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로빈슨은 우연히 만난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루이스의 도움 속에 로빈슨은 다른 흑인 지원자들과 함께 제복을 입게 됐다. 군대에서도 로빈슨의 외로운 투쟁은 계속됐다. 버스에서 흑인 자리로 가기를 거부해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했으며, 인종차별을 서슴없이 하는 백인 동료 장교와 싸움을 벌이다 불명예 제대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1947년 4월15일, 마침내 로빈슨은 1887년 이후 아무도 넘지 못했던 인종의 벽을 깨고 60년 만에 나타난 흑인선수가 됐다. 2만7000명 에베츠필드의 관중석에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러 온 흑인 관중이 1만4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칭한 로빈슨은 팀 동료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노장 외야수 디시 워커는 앞장서서 로빈슨을 쫓아내야 한다는 탄원서를 만들기도 했다. 로빈슨은 원정경기를 가더라도 동료들과 떨어져 흑인 전용 숙소를 이용해야 했으며, 그의 우편함은 매일 협박 편지로 가득찼다.

상대 투수들과 수비수들, 주자들은 로빈슨에게 고의적으로 테러를 가했다. 일부 심판들은 세이프도 아웃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로빈슨은 그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 뿐이었다.

 

1947년 5월14일 신시내티 크로슬리필드를 가득 메운 백인 관중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검둥이'를 합창했다. 신시내티 덕아웃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 때 다저스 유격수 피 위 리즈가 갑자기 자리를 이탈해 1루를 맡고 있던 로빈슨에게 다가갔다. 리즈는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남부 출신 스타인 리즈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관중들은 야유를 멈췄다. 이는 로빈슨이 버틸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이후에도 리즈는 로빈슨 대신 나서 로빈슨을 지켰다. 리즈는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색이어서는 안 된다"며 인종 차별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벤 챔프먼 감독이 소속팀 선수들에게 로빈슨에게 고의적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밝혀지면서 다저스 선수단 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챔프먼은 이 사건으로 야구계에서 퇴출됐다). 그렇지 않아도 로빈슨의 실력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던 다저스 선수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로빈슨을 동료로 받아들였다.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로빈슨에게 배달되는 편지는 대부분 '그라운드에 나오면 총으로 쏴버리겠다'는 협박 편지였다. 이에 대해 동료 진 허마스키는 농담 삼아 "우리가 모두 42번을 달고 나가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로빈슨은 "그렇더라도 나를 알아보게 될 걸"이라며 웃었다. 이는 훗날 재키 로빈슨 데이에 원하는 모든 선수들이 42번을 달고 나올 수 있는 이벤트의 바탕이 됐다. 다저스뿐 아니라 미국 사회에도 로빈슨 지지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방인은 이제 개척자가 됐다.

 

                                                                               재키로빈슨 부인(좌) 재키 로빈슨 딸(우)

 

그의 도전은 스포츠계 뿐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 있어 흑인과 유색 인종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이정표가 됐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미국 군대가 흑인의 입대 제한을 완전히 없앤 시기보다 1년 더 빨랐고, 공립학교에서 백인 학생과 흑인 학생을 따로 교육하던 것을 금지시킨 것보다도 8년이나 빨랐다.

그리고 로빈슨이 데뷔한 후 18년이 지나서야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의 자리 양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됐다.

 

그는 내셔널리그 MVP 1회등 강타자라기 보다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고, 출중한 수비력과 단독 홈스틸을 19회하는등 최고의 베이스러닝으로 1956년을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다져스에서 영구결번이 된 후 그가 데뷔후 50년이 지났던 1997년 최초로 MLB 전구단 영구결번이 되었다.

최초의 흑인선수, 최초의 흑인 올스타, 최초의 흑인 MVP, 최초의 흑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 위대한 선수이기 전에 진정한 영웅이었던 그에게 주는 후손들의 작은 선물이었다.

 

"베이브 루스는 야구를 바꾸고, 재키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출처: 김형준 기자의 "레전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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